사회과학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학적 모델은 우리 삶의 구체성과 복잡성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답을 선택하고 이를 분명히 자각한다고만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결과 고도의 추상적 수학 모델에 적용되지 않을것 같은 흥미로운 사건과 경험은 관심 밖 저 멀리로 사라진다. 자신이 떨어뜨린 물건을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만 찾고 있는 취객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반대 진영에 반이론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이는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명제를 포기하는 탈이론을 넘어 보편적 명제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세상 속에는 분명히 다양한 담론 혹은 이야기가 난무하고 주관적 요인이 사회적 사건에 결정적 작용을 한다는 점에 나는 누구보다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로는 세상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규정해 버리는 허무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가 정당화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추상적 원칙을 보검처럼 휘둘러 버리며, 일상의 지혜를 주기보다는 또 다른 편견과 독선을 심어줄 뿐이다.
사실 우리는 아는 만큼 현실을 본다.
많이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한다.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등 학문의 경계를 가릴 필요가 없다. 현실에는 학문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많이 알수록 많이 볼 수 있고 더욱 재미있고 현명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책만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멍청해지고, 공부하지 않고 생각만하면 위태로워진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부만 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사고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은 암기 공부이고 죽은 공부이다. 창의란 아는 것을 새롭게 결합하는 노력과 다름없다. 사고가 없으면 새롭게 얻은 지식은 다른 지식과 결합되지 못한 채 우리의 창조적 행위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멍청한 채로 남는 것이다.
반대로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면 생각이 외곬으로 빠진다. 배움이란 어쩌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사항을 알려 주는 점검표와 같다. 점검표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지 못했는지를 알아낼 수 없다. 공자는 지知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한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상태를 조금이라도 줄여 가는 과정이 학學이라 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을 때 우리는 사건, 사물, 사람의 좋은 측면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이다. 우리는 피할 수 없으면 사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승자를 치켜세우는 만큼이나 패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
마음은 한 가지밖에 떠올리지 못하고, 일단 한쪽으로 기울면 그 마음을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다. 소유효과와 자기 정당화가 우리 선택을 고정한다.
어장 관리는 만족을 추구하기보다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어장의 물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의 본질은 손실의 안타까움이다.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세분화될수록 소비자는 아이스크림 구매를 더욱 주저한다. 결정 장애가 발생한다. 선택의 역설이다.
선택 가능한 대안의 증가로 선택의 기회비용이 증가하면서 어떤 선택도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초콜릿 맛 옆에 초콜릿 바닐라 맛이 있기 때문이다. 선택 가능한 대안이 너무 많은 것도 스트레스이다.
인간의 기대와 실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안다면 애인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평소에 잘해 주면, 고마워하는 마음과 함게 상대의 사랑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진다. 이제 높아진 기대 수준에 비추어 상대의 행동을 평가한다. 행복감의 정도는 보상의 절대 수준이 아니라 보상에서 기대를 뺀 값임을 기억하자. 상승한 기대에 반하여 평소와 달리 무심한 행동을 한다면 한 번의 용서가 아니라 실망을 낳는다.
그런데 친구 관계에서는 반복되는 호의가 기대의 수준을 높이지 않고 신뢰의 수준을 높인다. 친구가 열 번 중 여덟 번 잘해 주었다면 두 번 정도 고집을 피우고 소홀하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친구를 따르고 용서한다.
그렇다면 친구 사이와 애인 사이는 어떻게 다를까? 목표가 있고 없고가 다를 것이다. 친구 관계를 정이 쌓인다고 해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이유가 없는 사이이다. 친구 관계에 목표는 없다. 하지만 애인 관계에는 결혼 혹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목표가 있다. 따라서 상대방의 호의와 친절은 신뢰로 쌓이기보다는 기대의 상승을 낳는다. 얼마나 많이 잘해 주었는가보다 전보다 더 잘해 주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애정의 총합이나 장기적 추이보다는 단기적 추이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관계는 크게 교환 관계와 공동체 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교환 관계는 호혜주의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계산적 관계이다. 내가 한 번 잘해 주면 네가 한 번 잘해 주어 계산의 균형을 맞추는 관계인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충성심과 열정을 기대할 수 없다. 데이트에서 내가 근사한 밥 한 끼 부담했으니 최소한 굿바이 키스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불평한다면 관계는 그 자리에서 파탄 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하라는 식의 태도는 관계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한 번 진 꽃이 다시 피기 어렵다.(낙화난상지 落花難上枝)
맑은 물은 구정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는 더러운 물로 변해 버린다. 더러워진 구정물에 아무리 맑은 물을 부어도 물은 다시 맑은 물로 변하지 않는다.
칭찬과 사랑보다 비난과 미움을 더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므로 과학계는 칭찬과 비난의 비율을 5대1로 유지할 것을 조언한다.
"남에게서 받은 은혜는 깊어도 갚지 않으면서, 원한은 얕아도 갚는다." - 채근담
손실에 대한 민감성으로 인해 태생적으로 우리는 공평할 수 없다. 자신이 준 상처보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더 깊고 아프게 느낀다.
인간은 평균과 변화에 민감하지만 총합에 둔감하며,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지만 즐거움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상대에 적응하고 나면 우리는 상대의 헌신을 자신의 권리로 인식한다. 감사하는 대신 싫증을 내다가 헌신이 약해지면 화를 낸다.
비교는 조작 가능하고, 우리는 스스로 국지적 비교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당신은 매장의 물건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상당히 주체적인 소비자이자 관찰자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정말이지 착각이다. 매장 관리자가 당신의 관찰과 비교를 이미 조작해 놓았기 때문이다.
은혜는 마땅히 옅음에서부터 짙음으로 나아가야 하니, 먼저 짙게 하고 뒤에 옅게 하면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잊어버린다. 위엄은 마땅히 엄격함에서부터 관대함으로 나아가야 하니, 먼저 관대하게 하고 뒤에 엄격하게 하면, 사람들은 그 혹독함을 원망한다.
우리는 계획이 반드시 어긋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의지와 용기로 가득 차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이 미래에 존재하는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은 생각들에 대해 떠오르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출석하지 않은 사람 손들어 보라는 질문이 우스운 이유와 마찬가지다.
희망은 열정이지만 왜곡이기도 하다. 강한 희망은 하나의 눈부신 터널만 만들어내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한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는 희망 사항만이 떠오를 뿐이다. 현실의 복잡성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미래에는 희망한 일들만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는 제삼자의 시각이 필요하다.
진실을 아는 상태에서 거짓말을 하려면 손에 땀이 나고 말을 더듬는다. 즉 진실을 알지 못할 때 거짓말을 가장 잘할 수 있다.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무능력이 우리를 능숙한 위선자로 만들어준다.
조직 내에서 유능한 집단과 무능한 집단이 한 판 대결을 벌이면 무능한 집단이 정치적으로 승리한다. 유능한 집단은 다른 직장이나 직종으로 옮길 수 있지만 무능한 집단은 옮길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열심히 싸운다. 아니, 평소에 열심히 뭉친다.
매력적인 자는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 역시 만들 수밖에 없다. 분명한 색깔을 지닌 매력적인 사람은 질투심 많은 음흉한 이들에게는 흠 잡기 딱 좋은 대상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눈에 띄는 흠을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는 지루한 사람에게 뚜렷한 장점이 없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지루한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을 이긴다.
보이지 않음과 없음을 동일시한다.
우연히 행운이 몇 번 연속해서 찾아온 행운아는 그 행운들을 발판 삼아 자신에게 유리한 인위적 장치를 만든다. 자신의 행운을 영속화하려는 것이다.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면 사회는 이를 막아야 한다. 우연한 몇 번의 행운을 영속화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우연을 보호해야 한다. 노력하고 실력을 쌓은 사람에게 언젠가 행운이 찾아가야 한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세상은 무섭고 슬프다.
경험주의자 베이컨의 언명처럼 '부재를 감각하기 sense of absences'는 너무나 어렵다. 실재는 감각을 자극하지만 부재는 이를 찾아보겠다는 마음을 미리 먹어야만 알 수 있다.
부재를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볼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이나 알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희일비하는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오랫동안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적응성을 무시한 채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상상하기 때문이다. 높은 급여, 좋은 복리후생 등 자신이 평소 꿈꾸는 희망사항만이 미래에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일상의 삶이 빠져 있다. 상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 마음에 활성화된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재를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은 더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애인을 그리며 어느 여성을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내 생각과는 달리 당신이 하지 않은 일이 참 많았어요." 놀라운 고백이다. 선물을 해주거나 맛집에서 밥을 사준 일 등 상대가 해준 일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상대의 사랑과 호의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감사하기는 쉽지 않다. 당하지 않은 못된 행동, 생기지 않은 불행 등에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평소 열심히 사고를 예방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사고의 부재에 고마워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일상의 연속으로 당연시한다. 칭찬과 감사는 고사하고 오히려 힐책과 비난이 돌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하고 나면 그런 위험을 감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타난다. 이처럼 사고의 가능성을 사전에 꽤 높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믿는 것을 후견지명 혹은 사후 확신 편향이라고 한다. 미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모든 것을 사건 발생의 징후로 새롭게 인식한다. 어제 생각지 못한 오늘의 결과를 보면서 '그럴 줄 알았지'라며 꾸짖고 조롱하는 것이다.
이른바 '깨는' 모습을 보면 멋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인 듯하다. 멋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이다. 만약 덧셈이라면 여러 요소 중 하나만 아주 뛰어나도 전체 값은 올라간다. 하지만 곱셈일 경우 하나라도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낮으면 전체 값은 크게 떨어진다.
외모가 뛰어난 경우 '왕자병', '공주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왕자병, 공주병은 고착형 마음가짐을 낳는다. 고착형 마음가짐은 매력, 지력, 성격 등 개인의 내재적 능력과 특질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 왕자이고 공주인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자질을 갈고 닦을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변하는 진짜 네 모습은 없다. 인생은 너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노력이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현대 사회심리학은 그 근거를 무한히 제공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행위는 태도의 변화를 유발한다.
태도와 인성을 마음만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려 산으로 들로 아무리 헤매어보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노력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세상으로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오랜 행위 틀 안에서 형성된 인성과 가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행위 틀이 필요하다. 새로운 행위 틀을 통해 새롭게 행동함으로써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태도를 경험할 수 있고 이를 반복하면서 다른 자아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사랑스러운 행위만큼이나 나쁜 행위도 태도의 변화를 유발한다. 더욱이 부정적인 것에 예민한 우리의 반응을 염두에 둘 때 나쁜 행위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변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주저하면서 한 발이 문턱에 걸쳐 있으면 나머지 한 발도 곧 문턱을 넘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방 안 깊숙이 들어가 있다. 일단 별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행한 사소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거나 기존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변화는 좀 더 강한 행위를 자극한다. 이렇게 우리는 점차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다듬어갈 때 멋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사적 공간에서도 완전히 솔직할 수 없다. 그러니 공적 공간에서는 당연히 과장과 극적 연출을 행한다. 나는 멋진 사람이며 지금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저말로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사적 신념이나 태도, 인생 역정을 밝히는 일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집단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서로 토론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다수의 의견에 크게 휘둘린다. 첫째, 다수의 의견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둘째, 다수의 입장에 동조함으로써 집단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동조는 동의가 되고 수용이 된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여론을 궁금해하고 이에 부화뇌동한다.
이렇게 우리는 다수의 선택에 의지해서 애매모호한 세상을 해석해 버립니다.
스스로 관찰해 판단하려면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회관계망 서비스 안에서 비교를 하며 절망하고, 여론에 떠밀려 몰지각한 판단과 행동을 한다. 같은 정보를 계속 추적하고, 다른 해석이나 평가가 가능하다는 상상은 하지 못한다. 잠시만이라도 고개를 돌려 두리번두리번해라. 다른 쪽을 보면 다른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는 무작위성과 운을 태생적으로 싫어한다. 운이 성공과 실패를 크게 좌우하는 세상사에서 운을 제쳐 놓고 기技만 본다. 운을 부정하는 인과적 설명은 실패한 사람을 두 번 죽이고 성공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수많은 성공담과 성공술이 판치는 세상에 대고 "멍청이야, 운이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기가 참 어렵다. 우리의 두 눈은 항상 자신 말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타인에 주목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잘못은 상황 탓으로, 다른 사람 잘못은 인성탓으로 돌린다. 이는 이기심과 상관없는 인간의 천성이다. 여기에 자존에 대한 욕망과 이기심이 더해지니 남의 입장에 서서 나를 반성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수많은 인지적 편향과 고약한 심보가 내재한 우리 인간은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은 변호하면서 남은 비방하거나 비판한다. 측은지심과 아전인수가 공존하는 것이 인간이다.
초기 설정값은 착하게 주어졌지만, 상황의 힘 앞에서 이는 쉽게 변한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렸을때 새로 구입하는 상황.
선뜻 선글라스를 구매할 수 없다. 가격이 곱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선글라스의 가격이 새로 구매하는 선글라스의 가격에 포함된 듯해서 물건을 새로 구입하기가 고통스럽다. 선글라스가 아니라 현금을 잃어버렸다면 다르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경제학자를 난감하게 한다. 어차피 당신이 잃어버린 경제적 가치는 현금이든 선글라스든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것이 현금인지 선글라스인지는 의사 결정에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줄어든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선글라스를 사고 싶은지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왜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 신혼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데도 비싼 유모차를 구매할까? 유모차는 쇼핑몰,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낭비벽이 아니라 대세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이를 '체면'이라 부른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내가 초대한 사람들만이 본다. 하지만 자동차와 유모차는 길거리의 모든 사람이 본다. 남들이 본다고 믿는 순간 사회적 압력이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 다수는 사회적 압력에 순응한다.
고마움을 언제 어떻게 표하는가에 따라 감사의 행위는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뒤에 표현할수로 감사를 받은 사람이 주변에 좋은 기운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의 성가신 행동을 인성과 의도로 설명하려는 우리의 오랜 습관이 화를 부른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자신의 배에 부딪혔다. 그 사람은 성미가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라 한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번째 소리치는데, 그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는가? - 장자
사공이 있는 배가 와서 부딪혔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현대 심리학의 근본귀인오류에 가깝다. 근본귀인오류를 다시 한 번 정의하면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적 요인을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의 내면적 태도와 도덕적 신념 등을 절대시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얼굴 대신 남의 얼굴을 본다. 이 때문에 엄청난 인식의 편향이 발생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과 잘못은 개인의 내재적 특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잘못은 상황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상황의 힘은 대단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주변 상황으로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듯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울 것이다. 빈 배가 와서 우리에게 부딪히면 화를 내지 않고 배를 밀어내듯이 말이다. 파도에는 그렇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사공이 있더라도 파도를 탓할 수 있다면 욱하는 마음을 피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생활을 더욱 풍요롭고 균형잡히게 한다. 세상의 똑똑한 이들이 피땀 흘려 연구한 다소 딱딱한 책과 논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제대로 알려면 배운 것을 끊임없이 현실에 적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배움이 독선이 아니라 지혜가 된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지적으로 흥분시키는 좋은 스승이 되고, 당위적 주장으로 젊은이의 말문을 막아버리지 않는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배움에는 영역이 없고 현실에는 경계가 없다. 일상의 문제는 종합적이고 융합적이다.
다양한 경험과학을 공부하고 공부한 것을 면밀한 관찰을 통해 일상에 적용하는 즐거움이 있을 때 우리 삶은 매일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당위적 주장만 열거하면서 서로를 숨 막히게 하는 무지와 독선에서도 조금은 멋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학이상달의 길이다.
용어설명
고착형 마음가짐
지력과 매력 등 각자의 내재적 능력은 불변한다는 믿음. 실패가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한다는 두려움은 도전 자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을 무작정 신뢰하는 태도로 연결됨.
부재를 감각하기 어려움
인식의 경험주의적 한계로서, 감각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정보를 인지하기 어려운 것을 말함.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을 고마워하기 힘든 마음이 여기에 해당함.
자기정당화
행위와 태도가 불일치할 경우 이미 변경 불가능한 자발적 행위 대신 내면의 태도를 행위에 일치시키려는 심리.
치킨게임
충돌이 가져오는 막대한 손실로 인해 게임의 참가자 모두가 충돌 대신 항복을 선호하는 전략적 상호작용 게임. 자동차 핸들을 뽑는 등 먼저 선수를 쳐서 상대가 피하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자가 유리한 게임임.
한계비용, 한계효용
추가적인 소비 혹은 생산에서 발생하는 비용이나 효용.
확증 편향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에만 주목하여 믿음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쉽게 결론 짓는 경향.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무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변호사처럼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임.
후견지명(사후 확신 편향)
사건이 발생한 직후 기억이 편집되면서 사건(사고) 발생 전에도 사건(사고)의 발생 가능성을 높게 생각했다고 착각하는 것을 말함.
<완> 20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