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없이 영화보기

from 유용한 팁 2018. 3. 1. 20:41

자막없이 영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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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국내도서
저자 : 정문정
출판 : 가나출판사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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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상을 견디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건 이해받았다는 느낌, 그래도 내가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관계 속 인정뿐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가 작은 호의만 보여도 금방 사랑에 빠져버린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달콤한 말로 조종하는 사람에게 속기도 쉽다. 자신이 행복을 누리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불행의 세계가 오히려 더 익숙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날 사랑하는게 맞아?" 하고 의심하고 집착하며, 상대를 시험하려 한다. 눈치를 보는 습관에 젖어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상대방을 고려하느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도 한다. 비극적인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첫째,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날 것. 그럴수록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너를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거절을 한다고 해서 떠나가진 않는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라고 질질 끈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고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 인간관계에서 자꾸 무리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바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가며 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대한 책임을 배우며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사람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인생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못되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남 탓을 하는 데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착하다는 평가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지길 권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항상 양보하지 않아도, 네 주장을 펼치더라도 미움받지 않는다"라고 조언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훈련을 하려면 '좀 미움받으면 어때?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거니까'하고 애써 담대해질 필요가 있다. 착해지려고 애쓰지 마라.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이다." - J.D.벤스


많은 취향이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 타협의 결과일 뿐이지 않은가? 안목이란 자본과 충분한 시간이 갖추어졌을 때, 실패해도 괜찮은 여유가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글 앞에서는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몰라서 후진 취향을 가진 게 아니라고요!"하고 항변하고 싶어진다.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 마스다 미리<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책에서 반복한다. 그는 자신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담담한 긍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오래도록 찾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통찰이 아닐까?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인간은 강요나 계몽 같은 방식으로는 바뀌지않는다. 자기 스스로 달라지기로 마음먹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해야만 바뀐다.


아이들은 자기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모르는 일을 없는 일처럼 대하는 건 얼마나 아이처럼 유치하고 좁은 행동인가.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쉽게 미워하게 되고, 윽박지르게 되고, 잘못부터 따지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를 준다. 딱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해 비판을 받으면 상대 쪽으로 튕겨내 버리는 데에도 능하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오래 관계를 맺으면,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정서적으로 불안해지며 자존감이 급격히 낮아진다.


일상의 관계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공감 능력의 부재로 인한 폭력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공감이 인간이 타곤 것 중 가장 위대한 능력인 이유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 같아서 누군가 나를 읽어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대충읽고선 다 아는양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다른 책 사이에서 나만의 유일한 가치를 발견해주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면 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무언가를 보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더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다.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은 그 상태가 유지되는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이곳저곳 망가져 간다. 매일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것 같지만, 그 덕에 최소한 더 나빠지지는 않는 것이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차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절실함만이 최악을 막아준다.


"언제까지 확답을 주면 돼?"


과한 호의는 주는 사람도 망가지게 하지만 받는 사람도 망치더라고.


사람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은, 적은 경험으로 일부의 모습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편견에 사로잡혀서인 것 같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당하듯 누구나 1인분씩의 불운을 만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 흉터에만 집중해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남을 미워하는 데서 헤어나지 못한다. 


내가 상처받기를 허락하는 상대를 만나는 건 정말 멋진 일이고, 상처에서 배우는 사람만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울면 슬퍼진다'는 제임스-랑게 이론

"마음이 몸을 바꾸듯 몸이 마음을 바꿀 수 있다" - 에이미 커디 교수<프레즌스>

'프레즌스(presence)' -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느낌, 가치와 잠재력을 최고로 끌어낼 수 있도록 조정된 심리 상태


자세와 몸짓, 표정과 신체 습관이 마음가짐을 결정한다.

신체언어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메시지를 주고, 스스로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자존감이 없어 고민이라면 남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신체 언어부터 점검해보자.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니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 미셸 오바마


이것들이 정말로 애정을 담은 비판인지, 걱정인 척 포장하며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는 것인지 따져봤다. 생각해보니 우선 나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말이 많았다. 단점은 장점보다 쉽게 보이고, 비판을 하면 스스로 우월감이 느껴져 그런 경우도 있었다. 그냥 재미로 그러기도 했고, 부러워서 그러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들도 나한테 그랬다는 것 아니겠나. 애정 없는 비판, 습관적인 비관, 통찰 없는 우려를 걸러내기 시작했다. 수년간 그러다 보니 나름의 기준도 생겨났다.

먼저 그것이 애정과 관심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한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무덤덤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큰일이라고 호들갑 떠는 일도 예전부터 쭉 있었던, 사소한 사안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라고 제기된 것이 과도한 일반화나 지나친 우려는 아닌지도 따져보자.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낮춰야 한다.


조울증처럼 '나 좀 괜찮은데?'와 '난 왜 이따위일까'라는 감정이 반복됐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불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비교와 질투, 나 자신에 대한 반복되는 실망,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어린 날의 상처 등이 자꾸만 울컥울컥 튀어나온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상처 덜 받고 자존감 높게 살고 싶지만, 그게 가능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안이란 없애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대상" -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는 건 감정의 진폭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울함이 찾아오더라도 빠르게 나아질 수 있는 회복력을 얻는 일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인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흔들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나 조언을 거대하게 받아들인다. 확신 있는 사람은 남에게 물을 시간에 그 일을 이미 하고 있다.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이 당신을 평가하거든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넘겨버려라.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하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잘 모를뿐더러 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회사는 아름다운 곳이 원래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음먹으면 역설적으로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교수 <픽스유>


회사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하면 '회사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상사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하고 자꾸만 원망하게 된다. 이상향을 설정하고 세상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일은 좋지만, 회사라는 조직의 특수성과 한계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야 만다. 회사는 '가족' 같은 곳이 원래 아니니까.


회사 자체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일뿐이므로 사내에서 나쁜 사람을 만나거나 회사의 방향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도저히 맞지 않으면 퇴사하면 될 일이지 자책하거나 괴로워하면 울 필요는 없다.


직장 상사는 당신의 멘토가 '원래' 아니다. 

직장 동료 또한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회사에서 만난 동료에게도 너무 많은 기대를 한다. 


회사나 회사 사람들에게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선 안 된다. 회사가 자기계발도 시켜주고 영혼의 단짝도 찾아주는 좋은 곳이라면 애초에 월급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모든 관계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유지될 수 있다. 회사가 나를 책임지지 않고 회사에서의 관계가 일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일로써 만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나치게 헌신하다가 배신감에 울 일도 없고 말이다. 


우리는 관계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다음 사람에게 옮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보석함에 보석들을 골라 담듯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자꾸 참으면 내가 무기력해진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만의 대처법을 갖춰야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떨어?" 하는 사람에게 그 평안은 다른 사람들이 참거나 피하면서 생겨난 가짜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 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 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나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문태준 <옮겨가는 초원 中>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겪는 편견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수 있나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답

"저도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이 계속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여자라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 내가 한국인이라, 동양인이라 차별받는 건가?' 상황이 좋고 결과도 좋고 협력도 잘될 때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거나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갈등이 있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거나 실망할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데서 '진의가 뭘까' 고민하지 않으려고 저 역시도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그건 정말 건강하지 않은 업무 습관인데 그 생각에 빠지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런 마음의 덫에 빠지는 동료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특히 당신이 리더의 자리에 있고 서로 다른 문화권을 동료들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대로 받아들이세요."


상대의 행동을 넘겨짚고 곱씹는 버릇을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자꾸만 의도를 곱씹다 보면 피해의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스트레스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무한하게 느껴지던 시간은 내가 건강할 수 있는 시간으로 가늠되고, 그중에서도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내 것이 아닐 시간으로도 환산해 체감하게 됐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니, 나에게 유효한 시간은 얼마 없었다. 철저하게 내게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 기준으로 세상을 보니, 예전 같았으면 그냥 참았을 만한 일 중에서도 내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하게 된다.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쓰면 정작 내가 필요한 곳에 쓸 수 없으니까.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다가 갑자기 인생이 끝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상상을 자꾸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자꾸 되내이는 것은 이것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가치 없는 곳에 쓰지 말 것.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서운함 때문에 마음속에 뾰족함이 자라나 뼈 있는 말로 자꾸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 관계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이때는 서로 지쳐서 그런다는 걸 알아차리고 서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나이가 들면 그동안의 경험치를 바탕으로 마음속에 사람의 유형을 혈액형 나누듯 감정적으로 구분하고, 내 스타일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자꾸 나누게 된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본능 같기도 한데, 이처럼 사람을 빠르게 판단해 편을 가르는 것이 습관이 되면 만나는 사람의 영역이 더는 확장되지 않고 멈춰버린다. 주변에 생각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만 두면 사람은 급속도로 '꼰대'가 되고 만다.


옷이 많아지자 막상 입을 옷은 더 부족해 보였다 .아침마다 뭘 입을지 고민하지만 정작 손이 가는 건 몇 개 없었다. 나에게 어떤 옷이 있는지를 다 기억하기 어려워지자 비슷한 옷을 또 사오기도 했다.


옷장과 책장을 정리하듯 인간관계도 주기적으로 상태를 살펴야 한다. 사람 사이 관계가 의미 있으려면 그것이 작용하는 맥락과 신뢰를 쌓기 위한 절대치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완> 2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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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생 맥케나 그레이스가 수학 천재 꼬맹이로 나오는 영화.


영화 보는동안 계속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바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보고싶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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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ElementById()

from Javascript 2018. 2. 26. 00:05

getElementById()


html, css의 구문에 변화를 줄수 있다.


Id기반.


<p id="demo">JavaScript can change HTML content.</p>


<button type="button" onclick='document.getElementById("demo").innerHTML = "Hello JavaScript!"'>Click Me!</button>



demo라는 Id를 가진 녀석의 innerHTML을 Hello~ 로 바꿔라...



<img id="myImage" src="pic_bulboff.gif" style="width:100px">


<button onclick="document.getElementById('myImage').src='pic_bulboff.gif'">Turn off the light</button>


myImage라는 Id를 가진 녀석의 src속성을 pic~로 바꿔라...



이렇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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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어제 한 행동을 알고 있다
국내도서
저자 : 한병진
출판 : 곰출판 2018.01.05
상세보기


사회과학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학적 모델은 우리 삶의 구체성과 복잡성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답을 선택하고 이를 분명히 자각한다고만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결과 고도의 추상적 수학 모델에 적용되지 않을것 같은 흥미로운 사건과 경험은 관심 밖 저 멀리로 사라진다. 자신이 떨어뜨린 물건을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만 찾고 있는 취객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반대 진영에 반이론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이는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명제를 포기하는 탈이론을 넘어 보편적 명제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세상 속에는 분명히 다양한 담론 혹은 이야기가 난무하고 주관적 요인이 사회적 사건에 결정적 작용을 한다는 점에 나는 누구보다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로는 세상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규정해 버리는 허무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가 정당화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추상적 원칙을 보검처럼 휘둘러 버리며, 일상의 지혜를 주기보다는 또 다른 편견과 독선을 심어줄 뿐이다.


사실 우리는 아는 만큼 현실을 본다.

많이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한다.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등 학문의 경계를 가릴 필요가 없다. 현실에는 학문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많이 알수록 많이 볼 수 있고 더욱 재미있고 현명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책만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멍청해지고, 공부하지 않고 생각만하면 위태로워진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부만 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사고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은 암기 공부이고 죽은 공부이다. 창의란 아는 것을 새롭게 결합하는 노력과 다름없다. 사고가 없으면 새롭게 얻은 지식은 다른 지식과 결합되지 못한 채 우리의 창조적 행위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멍청한 채로 남는 것이다.

반대로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면 생각이 외곬으로 빠진다. 배움이란 어쩌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사항을 알려 주는 점검표와 같다. 점검표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지 못했는지를 알아낼 수 없다. 공자는 지知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한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상태를 조금이라도 줄여 가는 과정이 학學이라 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을 때 우리는 사건, 사물, 사람의 좋은 측면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이다. 우리는 피할 수 없으면 사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승자를 치켜세우는 만큼이나 패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


마음은 한 가지밖에 떠올리지 못하고, 일단 한쪽으로 기울면 그 마음을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다. 소유효과와 자기 정당화가 우리 선택을 고정한다.


어장 관리는 만족을 추구하기보다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어장의 물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의 본질은 손실의 안타까움이다.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세분화될수록 소비자는 아이스크림 구매를 더욱 주저한다. 결정 장애가 발생한다. 선택의 역설이다. 

선택 가능한 대안의 증가로 선택의 기회비용이 증가하면서 어떤 선택도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초콜릿 맛 옆에 초콜릿 바닐라 맛이 있기 때문이다. 선택 가능한 대안이 너무 많은 것도 스트레스이다.


인간의 기대와 실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안다면 애인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평소에 잘해 주면, 고마워하는 마음과 함게 상대의 사랑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진다. 이제 높아진 기대 수준에 비추어 상대의 행동을 평가한다. 행복감의 정도는 보상의 절대 수준이 아니라 보상에서 기대를 뺀 값임을 기억하자. 상승한 기대에 반하여 평소와 달리 무심한 행동을 한다면 한 번의 용서가 아니라 실망을 낳는다.

그런데 친구 관계에서는 반복되는 호의가 기대의 수준을 높이지 않고 신뢰의 수준을 높인다. 친구가 열 번 중 여덟 번 잘해 주었다면 두 번 정도 고집을 피우고 소홀하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친구를 따르고 용서한다.

그렇다면 친구 사이와 애인 사이는 어떻게 다를까? 목표가 있고 없고가 다를 것이다. 친구 관계를 정이 쌓인다고 해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이유가 없는 사이이다. 친구 관계에 목표는 없다. 하지만 애인 관계에는 결혼 혹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목표가 있다. 따라서 상대방의 호의와 친절은 신뢰로 쌓이기보다는 기대의 상승을 낳는다. 얼마나 많이 잘해 주었는가보다 전보다 더 잘해 주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애정의 총합이나 장기적 추이보다는 단기적 추이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관계는 크게 교환 관계와 공동체 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교환 관계는 호혜주의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계산적 관계이다. 내가 한 번 잘해 주면 네가 한 번 잘해 주어 계산의 균형을 맞추는 관계인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충성심과 열정을 기대할 수 없다. 데이트에서 내가 근사한 밥 한 끼 부담했으니 최소한 굿바이 키스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불평한다면 관계는 그 자리에서 파탄 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하라는 식의 태도는 관계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한 번 진 꽃이 다시 피기 어렵다.(낙화난상지 落花難上枝)

맑은 물은 구정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는 더러운 물로 변해 버린다. 더러워진 구정물에 아무리 맑은 물을 부어도 물은 다시 맑은 물로 변하지 않는다.


칭찬과 사랑보다 비난과 미움을 더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므로 과학계는 칭찬과 비난의 비율을 5대1로 유지할 것을 조언한다.


"남에게서 받은 은혜는 깊어도 갚지 않으면서, 원한은 얕아도 갚는다." - 채근담


손실에 대한 민감성으로 인해 태생적으로 우리는 공평할 수 없다. 자신이 준 상처보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더 깊고 아프게 느낀다. 


인간은 평균과 변화에 민감하지만 총합에 둔감하며,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지만 즐거움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상대에 적응하고 나면 우리는 상대의 헌신을 자신의 권리로 인식한다. 감사하는 대신 싫증을 내다가 헌신이 약해지면 화를 낸다. 


비교는 조작 가능하고, 우리는 스스로 국지적 비교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당신은 매장의 물건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상당히 주체적인 소비자이자 관찰자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정말이지 착각이다. 매장 관리자가 당신의 관찰과 비교를 이미 조작해 놓았기 때문이다. 


은혜는 마땅히 옅음에서부터 짙음으로 나아가야 하니, 먼저 짙게 하고 뒤에 옅게 하면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잊어버린다. 위엄은 마땅히 엄격함에서부터 관대함으로 나아가야 하니, 먼저 관대하게 하고 뒤에 엄격하게 하면, 사람들은 그 혹독함을 원망한다.


우리는 계획이 반드시 어긋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의지와 용기로 가득 차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이 미래에 존재하는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은 생각들에 대해 떠오르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출석하지 않은 사람 손들어 보라는 질문이 우스운 이유와 마찬가지다.


희망은 열정이지만 왜곡이기도 하다. 강한 희망은 하나의 눈부신 터널만 만들어내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한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는 희망 사항만이 떠오를 뿐이다. 현실의 복잡성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미래에는 희망한 일들만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는 제삼자의 시각이 필요하다.


진실을 아는 상태에서 거짓말을 하려면 손에 땀이 나고 말을 더듬는다. 즉 진실을 알지 못할 때 거짓말을 가장 잘할 수 있다.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무능력이 우리를 능숙한 위선자로 만들어준다. 


조직 내에서 유능한 집단과 무능한 집단이 한 판 대결을 벌이면 무능한 집단이 정치적으로 승리한다. 유능한 집단은 다른 직장이나 직종으로 옮길 수 있지만 무능한 집단은 옮길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열심히 싸운다. 아니, 평소에 열심히 뭉친다.


매력적인 자는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 역시 만들 수밖에 없다. 분명한 색깔을 지닌 매력적인 사람은 질투심 많은 음흉한 이들에게는 흠 잡기 딱 좋은 대상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눈에 띄는 흠을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는 지루한 사람에게 뚜렷한 장점이 없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지루한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을 이긴다.


보이지 않음과 없음을 동일시한다. 


우연히 행운이 몇 번 연속해서 찾아온 행운아는 그 행운들을 발판 삼아 자신에게 유리한 인위적 장치를 만든다. 자신의 행운을 영속화하려는 것이다.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면 사회는 이를 막아야 한다. 우연한 몇 번의 행운을 영속화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우연을 보호해야 한다. 노력하고 실력을 쌓은 사람에게 언젠가 행운이 찾아가야 한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세상은 무섭고 슬프다.


경험주의자 베이컨의 언명처럼 '부재를 감각하기 sense of absences'는 너무나 어렵다. 실재는 감각을 자극하지만 부재는 이를 찾아보겠다는 마음을 미리 먹어야만 알 수 있다.

부재를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볼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이나 알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희일비하는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오랫동안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적응성을 무시한 채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상상하기 때문이다. 높은 급여, 좋은 복리후생 등 자신이 평소 꿈꾸는 희망사항만이 미래에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일상의 삶이 빠져 있다. 상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 마음에 활성화된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재를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은 더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애인을 그리며 어느 여성을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내 생각과는 달리 당신이 하지 않은 일이 참 많았어요." 놀라운 고백이다. 선물을 해주거나 맛집에서 밥을 사준 일 등 상대가 해준 일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상대의 사랑과 호의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감사하기는 쉽지 않다. 당하지 않은 못된 행동, 생기지 않은 불행 등에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평소 열심히 사고를 예방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사고의 부재에 고마워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일상의 연속으로 당연시한다. 칭찬과 감사는 고사하고 오히려 힐책과 비난이 돌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하고 나면 그런 위험을 감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타난다. 이처럼 사고의 가능성을 사전에 꽤 높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믿는 것을 후견지명 혹은 사후 확신 편향이라고 한다. 미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모든 것을 사건 발생의 징후로 새롭게 인식한다. 어제 생각지 못한 오늘의 결과를 보면서 '그럴 줄 알았지'라며 꾸짖고 조롱하는 것이다. 


이른바 '깨는' 모습을 보면 멋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인 듯하다. 멋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이다. 만약 덧셈이라면 여러 요소 중 하나만 아주 뛰어나도 전체 값은 올라간다. 하지만 곱셈일 경우 하나라도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낮으면 전체 값은 크게 떨어진다.


외모가 뛰어난 경우 '왕자병', '공주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왕자병, 공주병은 고착형 마음가짐을 낳는다. 고착형 마음가짐은 매력, 지력, 성격 등 개인의 내재적 능력과 특질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 왕자이고 공주인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자질을 갈고 닦을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변하는 진짜 네 모습은 없다. 인생은 너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노력이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현대 사회심리학은 그 근거를 무한히 제공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행위는 태도의 변화를 유발한다.


태도와 인성을 마음만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려 산으로 들로 아무리 헤매어보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노력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세상으로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오랜 행위 틀 안에서 형성된 인성과 가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행위 틀이 필요하다. 새로운 행위 틀을 통해 새롭게 행동함으로써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태도를 경험할 수 있고 이를 반복하면서 다른 자아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사랑스러운 행위만큼이나 나쁜 행위도 태도의 변화를 유발한다. 더욱이 부정적인 것에 예민한 우리의 반응을 염두에 둘 때 나쁜 행위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변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주저하면서 한 발이 문턱에 걸쳐 있으면 나머지 한 발도 곧 문턱을 넘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방 안 깊숙이 들어가 있다. 일단 별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행한 사소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거나 기존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변화는 좀 더 강한 행위를 자극한다. 이렇게 우리는 점차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다듬어갈 때 멋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사적 공간에서도 완전히 솔직할 수 없다. 그러니 공적 공간에서는 당연히 과장과 극적 연출을 행한다. 나는 멋진 사람이며 지금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저말로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사적 신념이나 태도, 인생 역정을 밝히는 일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집단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서로 토론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다수의 의견에 크게 휘둘린다. 첫째, 다수의 의견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둘째, 다수의 입장에 동조함으로써 집단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동조는 동의가 되고 수용이 된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여론을 궁금해하고 이에 부화뇌동한다.

이렇게 우리는 다수의 선택에 의지해서 애매모호한 세상을 해석해 버립니다.


스스로 관찰해 판단하려면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회관계망 서비스 안에서 비교를 하며 절망하고, 여론에 떠밀려 몰지각한 판단과 행동을 한다. 같은 정보를 계속 추적하고, 다른 해석이나 평가가 가능하다는 상상은 하지 못한다. 잠시만이라도 고개를 돌려 두리번두리번해라. 다른 쪽을 보면 다른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는 무작위성과 운을 태생적으로 싫어한다. 운이 성공과 실패를 크게 좌우하는 세상사에서 운을 제쳐 놓고 기技만 본다. 운을 부정하는 인과적 설명은 실패한 사람을 두 번 죽이고 성공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수많은 성공담과 성공술이 판치는 세상에 대고 "멍청이야, 운이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기가 참 어렵다. 우리의 두 눈은 항상 자신 말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타인에 주목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잘못은 상황 탓으로, 다른 사람 잘못은 인성탓으로 돌린다. 이는 이기심과 상관없는 인간의 천성이다. 여기에 자존에 대한 욕망과 이기심이 더해지니 남의 입장에 서서 나를 반성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수많은 인지적 편향과 고약한 심보가 내재한 우리 인간은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은 변호하면서 남은 비방하거나 비판한다. 측은지심과 아전인수가 공존하는 것이 인간이다. 


초기 설정값은  착하게 주어졌지만, 상황의 힘 앞에서 이는 쉽게 변한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렸을때 새로 구입하는 상황.

선뜻 선글라스를 구매할 수 없다. 가격이 곱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선글라스의 가격이 새로 구매하는 선글라스의 가격에 포함된 듯해서 물건을 새로 구입하기가 고통스럽다. 선글라스가 아니라 현금을 잃어버렸다면 다르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경제학자를 난감하게 한다. 어차피 당신이 잃어버린 경제적 가치는 현금이든 선글라스든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것이 현금인지 선글라스인지는 의사 결정에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줄어든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선글라스를 사고 싶은지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왜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 신혼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데도 비싼 유모차를 구매할까? 유모차는 쇼핑몰,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낭비벽이 아니라 대세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이를 '체면'이라 부른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내가 초대한 사람들만이 본다. 하지만 자동차와 유모차는 길거리의 모든 사람이 본다. 남들이 본다고 믿는 순간 사회적 압력이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 다수는 사회적 압력에 순응한다. 


고마움을 언제 어떻게 표하는가에 따라 감사의 행위는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뒤에 표현할수로 감사를 받은 사람이 주변에 좋은 기운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의 성가신 행동을 인성과 의도로 설명하려는 우리의 오랜 습관이 화를 부른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자신의 배에 부딪혔다. 그 사람은 성미가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라 한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번째 소리치는데, 그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는가? - 장자


사공이 있는 배가 와서 부딪혔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현대 심리학의 근본귀인오류에 가깝다. 근본귀인오류를 다시 한 번 정의하면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적 요인을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의 내면적 태도와 도덕적 신념 등을 절대시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얼굴 대신 남의 얼굴을 본다. 이 때문에 엄청난 인식의 편향이 발생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과 잘못은 개인의 내재적 특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잘못은 상황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상황의 힘은 대단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주변 상황으로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듯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울 것이다. 빈 배가 와서 우리에게 부딪히면 화를 내지 않고 배를 밀어내듯이 말이다. 파도에는 그렇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사공이 있더라도 파도를 탓할 수 있다면 욱하는 마음을 피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생활을 더욱 풍요롭고 균형잡히게 한다. 세상의 똑똑한 이들이 피땀 흘려 연구한 다소 딱딱한 책과 논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제대로 알려면 배운 것을 끊임없이 현실에 적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배움이 독선이 아니라 지혜가 된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지적으로 흥분시키는 좋은 스승이 되고, 당위적 주장으로 젊은이의 말문을 막아버리지 않는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배움에는 영역이 없고 현실에는 경계가 없다. 일상의 문제는 종합적이고 융합적이다. 


다양한 경험과학을 공부하고 공부한 것을 면밀한 관찰을 통해 일상에 적용하는 즐거움이 있을 때 우리 삶은 매일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당위적 주장만 열거하면서 서로를 숨 막히게 하는 무지와 독선에서도 조금은 멋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학이상달의 길이다. 





용어설명


고착형 마음가짐

지력과 매력 등 각자의 내재적 능력은 불변한다는 믿음. 실패가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한다는 두려움은 도전 자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을 무작정 신뢰하는 태도로 연결됨.


부재를 감각하기 어려움

인식의 경험주의적 한계로서, 감각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정보를 인지하기 어려운 것을 말함.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을 고마워하기 힘든 마음이 여기에 해당함.


자기정당화

행위와 태도가 불일치할 경우 이미 변경 불가능한 자발적 행위 대신 내면의 태도를 행위에 일치시키려는 심리.


치킨게임

충돌이 가져오는 막대한 손실로 인해 게임의 참가자 모두가 충돌 대신 항복을 선호하는 전략적 상호작용 게임. 자동차 핸들을 뽑는 등 먼저 선수를 쳐서 상대가 피하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자가 유리한 게임임.


한계비용, 한계효용

추가적인 소비 혹은 생산에서 발생하는 비용이나 효용.


확증 편향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에만 주목하여 믿음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쉽게 결론 짓는 경향.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무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변호사처럼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임.


후견지명(사후 확신 편향)

사건이 발생한 직후 기억이 편집되면서 사건(사고) 발생 전에도 사건(사고)의 발생 가능성을 높게 생각했다고 착각하는 것을 말함. 


<완> 20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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